운명의 만남이 너를 기다리고 있어 (10)

    아직 이른 아침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와 함께 조용한 사무소 로비의 문이 열렸다. 손에 들린 파일 안엔 연습생 계약서와 함께, 며칠 전 1차와 2차 오디션을 통과한 이름이 인쇄되어 있었다.

‘사쿠지이 치세이’
 
    오늘은 그 이름의 주인공, 자신이 이곳에 ‘들어가도 되는 사람인지’ 확인받는 날이었다. 타무라 사장이 직접 면접을 진행했다. 그의 인상은 생각보다 더 ‘밝은 어른’ 같았지만, 질문 하나하나엔 날이 서 있었다. 사무실 안, 둥근 탁자 너머로 마주한 타무라 사장은 종이를 한 장 넘기며 물었다.
 
타무라 사장
노래, 좋아해?
 
    치세이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사쿠지이 치세이
…네.
 
타무라 사장
좋아하는 거랑, ‘하고 싶은 것’은 조금 다르지. 그래서 물을게. 너는 왜, 노래하고 싶어?
 
    질문은 짧았지만, 너무도 깊었다. ‘왜 노래하고 싶은 걸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입 밖으로 뱉자니 갑자기 낯설어졌다. 잠시 말문이 막힌 치세이는 고개를 숙였다. 정리되지 않은 마음들, 설명하기엔 너무 오래 감춰두었던 감정들. 그 끝에서, 입술을 다물고 생각하다— 드디어 입을 열었다.
 
사쿠지이 치세이
…그냥, 어릴 적부터 그랬어요. 조용히 듣기만 했는데, 듣는 것만으로도 괜찮아지는 때가 있었거든요. 아팠던 날, 외로웠던 날.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냥 있어 주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더라고요.
 
타무라 사장
…음.
 
    의자에 기대 앉은 타무라 사장이 천천히 손끝을 두드렸다.
 
사쿠지이 치세이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그냥, 조용히라도 전해질 수 있는. 외로운 아이들에게, 저도 그런 마음을 노래하고 싶어서…
 
    잠시 시선을 떨군 치세이는 말을 이어갔다.
 
“홍보문구요. 그거 하나 보고 왔어요.”
조금 쑥스러운 얼굴로,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당신의 진심을 들려주세요. 전해질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정적이 흘렀다. 타무라 사장은 종이를 덮고 두 손을 탁자 위에 포갰다. 그리고 천천히 웃었다. 장난스럽지만, 이상하리만큼 다정한 웃음이었다.
 
타무라 사장
응, 완전 굿이잖아~!
 
팡팡—

치세이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타무라 사장
좋다. 좋아, 너 그 마음 그대로 잊지 마. 그건 쉽게 얻는 말이 아니거든.
 
치세이는 멍하니 타무라 사장의 얼굴을 바라봤다.
 
타무라 사장
…근데 말이지. 미성년자는 부모님 동의가 필요해서~.
 
다소 익살스럽게 말을 마친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타무라 사장
이번 주 안으로 부탁할게~?
 
사쿠지이 치세이
네...!
 
타무라 사장
하하, 좋아. 그럼, 곧 다시 보자.
 
    탁, 계약서를 봉투에 넣어 치세이에게 건네며 손을 내밀었다.
 
타무라 사장
사쿠지이 치세이. 앞으로 잘 부탁해.
 
사쿠지이 치세이
……네.

    작은 손이 조심스럽게 악수를 받았다. 처음으로 누군가가 이름을 또박또박 불러주는 느낌이었다. 
 
    사무소를 나와 집으로 향하는 길. 손에 든 연습생 계약서와 부모 동의서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종이 몇 장일 뿐인데. 하지만 그 안엔, 분명히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사쿠지이 치세이’ 이름 석 자가 이 세상 어딘가에 ‘등록’되는 순간이었다. 작은 발걸음이 천천히 집으로 이어졌다. 불 꺼진 복도와 전철의 흔들림조차 오늘따라 너무 조용했다. 이건 막연한 설렘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작은 책임감이기도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집 안은 평소처럼 조용했다. 현관에 걸려 있는 가방들, 깨끗하게 정돈된 거실. 익숙한 정적이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부모님은 출장 중. 누구의 말소리도, 지금 이 집에는 없다. 식탁 위에 가방을 내려놓고, 조용히 의자에 앉는다. 계약서를 꺼내 펼쳤다. 한 장, 또 한 장. 조항을 넘길 때마다 종이의 끝이 조금씩 떨렸다. ‘어떻게 말하지…’ ‘뭐라고 설명하면 될까.’ 그렇게 계속 읽고만 있다가, 어느새 고개를 떨군 채—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깨 위로 살짝 닿는 기척. 귓가에 맴도는 낯익은 숨소리.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엔 언니, 사쿠지이 세츠카가 서 있었다. 언제 퇴근했을까. 간호사 유니폼 위엔 아직도 병원 특유의 비누 향이 희미하게 감돌았다. 그 손에는, 치세이가 펼쳐 놓았던 동의서가 들려 있었다. 치세이를 말없이 내려다보던 세츠카가 조용히 물었다.
 
사쿠지이 세츠카
…괜찮겠어?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 눈빛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걱정’이었다. 한참 전. 어린 치세이가 열에 뒤척이고 있을 때, 참고 또 참고, 결국 소리도 못 내고 울던 그때. 그 모습이, 지금 겹쳐 보였던 거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치세이는 눈을 맞추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쿠지이 치세이
이젠… 괜찮아. ...하고 싶으니까.
 
    그 말이 전부였다. 작고, 단단한 의지였다. 그제야 세츠카는 아무 말 없이 조심스레 치세이를 끌어안았다. 어릴 적엔 자신이 품어야 했던 이 동생이— 지금은 제 발로, 자신의 마음을 말하고 있었다.
 
사쿠지이 세츠카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기.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기. …약속해.
 
    그 목소리는, 옛날의 어느 날과 꼭 닮아 있었다.
 
    어릴 적. 치세이는 병원에 가기 싫어서, 부모님이 슬퍼하는 얼굴이 보기 싫어서, 늘 꾹 참았다. 열이 펄펄 끓어도, 침대 위에서 베개를 끌어안은 채 숨을 죽이던 날들. 그걸 가장 먼저 알아차렸던 건, 늘 언니 세츠카였다. 고등학생이던 언니는, 작은 동생을 꼭 끌어안고 거실로 나가 부모님께 소리쳤다. “왜 애가 이러고 있는데 아무도 모른 거냐고…!!” 그때, 어린 치세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냐, 그러지 마… 내가 걱정 시키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하지만 걱정이라는 건, 숨긴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그날 밤, 언니와 둘만의 방에서 치세이는 처음으로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 언니는 말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기.”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기.”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날의 약속은, 지금도 치세이의 마음 한 귀퉁이에 고이 남아 있다. 현실로 돌아와— 치세이는 살며시 눈을 내리고, 언니의 품에 얼굴을 묻는다.
 
사쿠지이 치세이
“응… 약속해.”
 
    그 짧은 대답 안에는, 어릴 적 받았던 그 따뜻함을 다시 되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 언젠가 이 아이가, 자신이 받은 따뜻함을 ‘목소리’로 전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 아이만의 속도로, 이제부터의 꿈을 걸어가길. 세츠카의 눈에 아직 어리기만한 동생의 모습과 지금 고등학생이 된 치세이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아무 말 없이 꾹 안아주었다. 조용히, 오래도록.
 
    그러다 한동안 이어지던 고요를, 언니가 장난스레 툭, 깨뜨렸다.
 
사쿠지이 세츠카
“근데 너, 연습할 때 입을 옷은 있어~?”
 
    치세이는 피식 웃었다. 어릴 적 아픈 아이였던 자신은 지금, 꿈을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