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pyright, 무제 님
 

[1]
    치세이는 문득 생각했다. 아이조 군 말이야, 뭐랄까⎯ 결코 그런 의미를 담은 건 아니지만, 조금…… 개를 닮지 않았나? 하고. 자신을 보며 넋 놓고 있는 치세이에 아이조가 고개를 기울였다. 손에는 여전히 치세이에게 건넬 이어폰 줄을 쥔 상태로. 너, 어디 아프냐? 갑자기 멍때리기나 하고. 그 말에 잠시 생각으로 빠지던 치세이의 정신이 돌아왔다. 아, 아니! 분명 아이조가 들으면 화낼 상상이었기에 입에 담지 않고, 아이조가 건네는 이어폰 줄을 받아 제 귀에 꽂았다. 그러자, 이어폰을 통해 아이조가 좋아하는 기타 연주 소리가 치세이의 귀까지 닿는다. 가만히 그 연주 소리를 들으며 치세이는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아이조도, 치세이도 별다른 일정이 없는 평범한 휴일, 사쿠, 할 거 없으면 밥 먹으러 와. 휴일이라고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다가 점심 먹을 때를 놓칠 치세이의 모습이 선했다. 아이조의 라인에 예상대로 침대에 누워 있던 치세이가 급히 일어나 씻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빈손으로 갈 순 없으니, 집에서 찾은 적당한 간식거리를 들고. 치세이가 아이조의 집 초인종을 누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은 금방 열렸다. 일찍 왔네, 그 말을 남긴 채 치세이가 들어올 때까지 문을 잡아주는 아이조에 치세이의 손발이 동시에 뻗어진다. 딱히 처음도 아니지만, 올 때마다 긴장되는 건 치세이의 성정상 어쩔 수 없었다. 왜 이렇게 긴장하는 거야, 그냥 집에 들어올 뿐인데. 아이조는 다소 툴툴거리긴 해도 재촉하지 않고 그런 치세이를 기다린 다음, 편하게 앉아 있으라며 치세이를 소파로 안내했다.
 
    밥 먹으러 오라고 했으니까, 바로 밥을 먹으려나? 하고 생각한 치세이의 예상과는 달리, 아이조는 치세이의 곁을 맴돌았다. 사쿠, 옷 줘. 걸어줄게. 아직 밥 다 되려면 멀었으니까 조금 더 기다려. ……너 얼굴이 조금 붉은데, 추운 거 아냐? 이거라도 두르고 있던가. 치세이의 곁을 떠나지 않고 세심하게 챙겨주는 아이조 덕에 치세이는 겉옷을 벗고, 어깨 위와 무릎 위에 각 담요를 두른 채 쿠션을 안고 있었다. 쿠션, 부드러워…… 하마터면 잠들 뻔한 극진한 서포트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생각하긴 했지만. 아이조 군은 말은 거칠어도 실은 다정한 사람이니까. 금방 납득할 수 있었다. 아이조는 식사 준비를 마무리하러 주방으로 넘어가면서도 치세이에 대한 신경을 거두지 않았다. 오늘따라 아이조 군이 더, 음…… 아닌가? 잠깐 생각한 것뿐이지만, 저를 신경 쓰는 아이조의 모습이 분리불안 강아지 같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정말로!
 
    곧 아이조의 부름에 식탁으로 이동한 치세이는 아이조가 준비해 준 밥을 먹고 느긋하게 소파에 앉아 휴일을 만끽하고 있었다. 이렇게 편안하게 보내도 되는 걸까? 싶을 정도로. 특별히 무언가를 함께하지 않아도, 두 사람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서로의 온기를 느꼈다.
 
    아이조 군은 이걸로 괜찮을까? 하고 옆을 돌아보아도 최근에 발매한 잡지를 보는데 바쁜 것 같고. 잘은 모르겠지만, 아이조가 괜찮다면 다행인 걸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심하게 각자의 일을 한다고는 하지만, 치세이가 무심코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면 그 시선을 바로 알아채고선 필요한 거 있어? 뭐 마실래? 치세이가 잡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음료와 함께 간식을 챙겨주었다. 아이조가 다정한 건 알고 있었지만, 정말로 뭐랄까…… 과자를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실례일지도 몰라, 그래도 오늘의 아이조 군은 제법 강아지 같아……!
 
[2]
    아이조가 사둔 잡지를 둘러보던 치세이에게 이어폰 한쪽이 내밀어졌다. 시선을 돌리니, 아이조가 태연한 얼굴로 이어폰을 내밀고 있었다. 간식을 가져오면서 플레이어도 함께 들고 온 듯했는데, 뭔가 듣고 있었구나. 나도 들어도 돼? 하고 물으니, 그러라고 주는 거잖아. 당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새삼 이 플레이어도, 이어폰 줄도 아이조 군이 자주 애용하는 거였지. 플레이어 안에는 아이조 군이 좋아하는 노래라던가 연주가 가득할 테고. 좋아하는 걸 치세이에게 공유하려는 그 모습이, 자신을 이루고 있는 무언가를 제게 내밀어 주는 아이조의 모습이, 종일 떠올렸던 아이조 군 오늘따라 개를 닮았어⎯와 겹쳐서, 이어폰을 꽂고 귀에 들어오는 기타 연주를 듣던 치세이가 놀란 듯 입을 벌렸다. 꽂았던 이어폰을 빼 손에 쥐고서는 이거, 마치 목줄 같지 않아?! 그런 생각까지 도달하고 말았다.
 
    그래, 조금 전 제게 이어폰을 건네주던 아이조의 모습이, 산책을 가자며 목줄을 가져오는 강아지와도 닮아서. 그만 입을 틀어막고 아이조를 돌아보았다. 치세이의 시선을 느낀 아이조가 떨떠름한 얼굴로 왜? 하고 묻자, 치세이는 망설임 없이 아이조 군, 산책 가지 않을래?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치세이가 무심코 줄을 당기자, 연결된 다른 쪽 이어폰을 꽂고 있던 아이조가 치세이 쪽으로 당겨졌다. 헉, 미안! 당길 생각은 없었는데. 아니, 딱히…… 그것보다 갑자기? 이어폰을 다시 귀에 꽂고, 치세이가 놀라 손에서 놓은 이어폰 한쪽을 내밀었다. 자연스럽게 이어폰을 받으며 아이조의 머리를 여러 차례 쓰다듬었다.
 
    “응, 날씨도 좋고 말이야.”
    “하아……!? 이 손 안 치워?!”
 
    아이조 군, ‘손!’은 안 될까? 산책이니, 손이니, 개 취급은 뭔데?! 아이조는 황당해하면서도, 끝내 치세이를 뿌리치지 못하고 그 손길을 받았다. 불퉁한 얼굴로 턱을 괴고 있지만, 그것이 마냥 나쁘진 않은지 싫은 얼굴은 아니었으니까. 만약 아이조에게 꼬리가 있었다면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지 않을까, 하고. 치세이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전다음

01

copyright, 무제 님

comission, 뭐람 님

[1]

    무작정 바람을 가로질러 푸르른 하늘 아래를 달렸다. 평소에는 불편하다고 여긴 적 없는 드레스가 오늘따라 걸리적거리기만 해서, 이것 또한 당신이 알려준 새로운 감정이라고 여겼다. 손을 잡고 무작정 달린 탓에 제게 끌리듯 함께 발을 내디딘 당신을 바라보니, 조금은 당혹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이내⎯…… 이대로 아무도 보지 못할 곳으로, 닿지 못할 곳으로 당신을 데리고 가고 싶다고, 문득 생각해 버린 푸른 하늘의 아래.

⚜

    단조로운 일상이었다. 정해진 교육대로, 정해진 일상을 보내는. 그럼에도 그때는 그것이 크게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제가 해야 할 일이 이렇다면 그저 해낼 뿐이라고, 치세이는 생각했으니까. 그런데도, 조금은 답답해……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에서, 치세이만의 작은 화원에 숨은 치세이가 작게 숨을 내뱉었다. 어딜 가든 그를 지키는 호위가 붙고, 행동은 늘 단정하게, 일국의 공주답게 품위를 지켜야만 했으니. 그 순간 올려다본 하늘이 시선을 빼앗길 정도로 눈부셔서, 저 하늘 아래를 마음껏 달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바로 그때였다. 그 누구도 찾지 못할 곳에 발을 디딘 누군가가 말을 걸어온 건. 화들짝 놀란 치세이가 시선을 돌리자, 저를 보며 웃는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했다. 누, 누구……?! 그리고 귀를 기울이니, 다른 쪽에서 호위 기사들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침입자를 찾는 모양인데, 이곳에서의 침입자라고 한다면…… 고민이 있는 얼굴은 당신과 어울리지 않는데. 괜찮다면 모든 걸 버리고 떠나지 않을래요? 동쪽의 나라로. 그렇게 웃는 얼굴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당혹스러운 첫 만남, 하지만 그게 싫지 않다고 하면, 내가 이상한 사람인 걸까.

    정식으로 초대받지 않은 왕자가 공주와 만나다니. 당연히 문제가 되는 일이었음에도 동쪽에서 온 왕자, 자신을 아이조라고 소개한 그 왕자님은 태연하기만 했다. 놀람과 동시에 다른 이유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치세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하지 못할 행동이었으니까. 하면 안 돼, 의 영역은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아서 언제나 착한 아이처럼 올바른 공주로 남아야한다는 강박이 내심 치세이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슬을 끊어준 건,

[2]

    갑작스럽게 등장한 동쪽 나라의 왕자님. 그를 만난 이후로 치세이의 세계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아이조가 보여주는 세상은, 데려다주는 장소는, 그가 들려주는 꿈의 이야기는 정말 환상적이라. 아버지께서 만나면 안 된다고 못을 박았으면서도, 치세이는 그의 옷깃을 잡았다. 조금만 더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을래요……?! 그럼, 아이조는 언제나처럼 다정한 얼굴로 치세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야기로 만족할 수 있어? 내 손을 잡아, 분명 이야기로는 만족하지 못할 풍경을 선물할 테니까. 아버지는 동쪽의 왕자를 악마의 속삭임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가까이 가면 안 된다며 치세이의 의지 없이 미루고 있던 약혼까지 단숨에 진행해 버렸다. 분명 나쁜 사람은 아니야, 하지만 치세이의 마음은 이미⎯

    악마의 속삭임 같은 거 잘 모르겠어. 그렇지만 그게 아이조라면, 그런 속삭임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아이조가 치세이를 찾아오지 않는 사이, 치세이는 좋아하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제게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풍경을, 세계를 넓혀주는 동쪽의 왕자님에게 제 나름의 행복을 선물해 주고 싶다고. 하지만 치세이가 가진 것은 아이조가 가진 것보다 적어서, 착한 아이로 살며 그만을 위한 성에서 홀로 지낸 지 너무 오래되어서, 그 무엇을 주어도 아이조가 제게 안겨준 것보다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랑이는 바람,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는 구름, 푸른 하늘에 수놓은 아름다운 풍경. 그를 눈에 담은 치세이의 눈이 반짝였다. 그리고, 아이조에게 짧은 편지를 썼다. 용건은 간단했다. 동쪽의 왕자님에게⎯

⚜

    치세이는 저를 찾아와 준 아이조의 손을 잡고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계획은 완벽했다, 언제나 든든하게, 하지만 때로는 갑갑하게 느껴질 정도로 제 주위를 지키는 호위의 눈을 벗어나, 아이조의 손을 잡고 멀리 달아나는 저를 보며 다급히 외치는 사용인들을 외면하고, 오직 아이조의 손만을 꽉 붙든 채로 달려 나갔다. 그러나 막상 달리기 시작하니 늘 입던 드레스가 불편해서, 높기만 한 구두가 불편하기만 했다. 단 두 사람만이 있을 수 있는 곳으로, 아이조를 데려가고 싶었는데, 제 일상에 머물던 이 불편한 감각들이 제 앞길을 막는 듯한 느낌, 생전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그러니 치세이는 마음껏 벗어던질 수 있었다. 달리는데 불편한 구두도, 밑단이 길어 불편한 치마의 밑단도. 공주라고 하기엔 다소 용모가 깔끔하지 못했다. 어릴 적부터 받아온 교육이 있었음에도. 그런데도 치세이는 개의치 않았다. 아이조를 마주한 채 그 어느 때보다 밝게 웃었다. 처음 느껴보는 자유를, 당신과 함께라면 두려울게 없어!

[3]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간지럽힌다. 오늘은 이 하늘이 가장 푸르른 여름의 어느 날, 정해둔 목적지는 사실 없었지만, 치세이는 제 세계를 아이조에게 보여주듯이 첫걸음을 내딛는 드넓은 곳으로 그를 데려갔다. 비록 아이조의 세계보다는 초라할지 몰라도, 그렇게 완벽한 풍경이 아니어도, 울퉁불퉁하고 흙만 가득한 길이라고 해도, 신기루처럼 쉽게 끝나버릴 시간이어도, 특별한 추억으로 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당신을 데려가고 싶었어, 이 푸른 하늘의 여름으로. 치세이에게 다양한 세계를 알려준 아이조라면 분명 이 짧은 하루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추억으로 새겨줄 테니까.

    공주님?! 하고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마주하며 환하게 웃었다. 마주한 치세이의 얼굴이 가장 밝게 빛나고 있어서, 치세이의 의지로 정해진 틀을 벗어나는 건 처음이었고, 그 처음의 순간에 저를 넣어 하나의 추억으로 새겨주었으니. 그 빛나는 얼굴을 따라 아이조도 미소지었다. 비록 짧은 순간이라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오늘이라는 이름의 이 추억은 기억으로,
냄새로, 온기로 남아 시간이 흘러 모든 게 잊혀진다고 해도 서로에게 잊지 못할 추억으로 자리 잡을 테니까.

    끝없는 길을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이 하염없이 달렸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과 그에 맞추어 하늘을 간지럽히는 꽃잎들이 두 사람의 길을 열어주는 것만 같았다. 땅에 새겨둔 발자국을 제외한다면 그들이 이곳을 가로질러 두 사람만의 세상으로 나아갔다는 건, 아마 그들만이 기억할 특별한 한 페이지였다.

    단순히 공주님과 왕자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같은 엔딩으로 이 페이지를 마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당신에게, 조금 더 특별한 사람으로, 추억으로 남고 싶어. 치세이의 그런 마음을 바람에 담아 아이조의 손을 끌었다. 아이조가 치세이에게 몸을 가까이 붙였다. 문득 구두를 벗어 던져 흙투성이에 드문드문 상처가 생긴 치세이의 발이 눈에 들어왔다. 공주님에겐 언제나 완벽한 유리 구두가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그의 발이 상처에 생길 일은 드물 터, 그럼에도 아픈 티를 내지 않고 신경 쓰지 않는 듯 아이조를 이곳까지 데려와 준 치세이는 자유를 만끽하는 것처럼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마셨다. 그리고 언제나 아이조를 시선에서 놓지 않을 것처럼 그를 돌아보았다. 이 시간에, 추억에, 시야에. 그를 각인시키는 것처럼.

[4]

    스스로 자유를 찾은 공주님의 의지를 응원하고 마음에 부응하듯, 그는 치세이를 마주했다.

    “오늘 공주님이 만들어 준 추억은 영원히 내 마음에 남을 테니까.”

    순수한 웃음으로, 마치 치세이를 닮은 듯한 하늘을 등진 채 웃음을 터트리는 치세이의 허리를 잡아 두 팔을 쭉 뻗어 가장 높은 곳으로 안아 올렸다, 깜짝 놀란 치세이가 급히 아이조의 어깨를 붙잡았지만, 제 시야 가득 들어오는 아이조, 그리고 훅 꺼진 발아래가 보여 곧 편하게 웃을 수 있었다. 발밑에 어떤 것도 닿지 않는 감각, 그것은 단순한 감상이었지만, 언제나 누군가가 신겨주는 유리 구두, 누군가가 이끄는 길만을 걸어온 치세이에겐 특별한 의미였다. 아무도 없는 들판에서, 두 사람은 그저 서로만을 느꼈다.

    혹여나 헤어지게 되더라도, 우리의 만남이 신기루처럼 흩어져 사라진다고 해도, 이 추억을 삼아 끝나지 않는 이 여름에서 다시 만날 테니까. 새겨둔 추억이란 그러했다. 언제라도 열고 그때의 감정을 되살릴 수 있는 매체. 그런 추억을,

     ⎯내게 선물해 줘서 고마워, 나만의 공주님.

    바람이 불어온다. 마치 두 사람의 길을 축복하듯이. 바람 속에 감춘 두 사람의 웃음소리를 머금으며 그들의 볼을 간지럽혔다.

이전다음

0123

Copyright, 무제 님

 
[1]
    아이조가 뚱한 얼굴로 학교에서 챙겨온 초콜릿 무더기를 응시했다. 신발장부터 시작해서 사물함, 책상 서랍, 그리고 책상 위까지. 서랍의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을 정도로 잔뜩 쌓인 초콜릿에 일단 급한 대로 들고 올 수 있는 만큼만 챙겼는데도 LipxLip 대기실에 쌓인 초콜릿은 산처럼 높기만 했다. 교내의 팬들이 주는 초콜릿, 그리고 스케줄을 이동하며 자신들을 기다려 준 팬들이 건넨 초콜릿이 기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아이조의 심기는 그와는 다르게 조금 불편했다. 물을 마시던 유지로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딱히 무슨 일인지 물을 생각은 없었지만, 묻지 않아도 상황을 전부 알 것만 같았다.
 
    다가오는 밸런타인데이, 요즘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 상대에게 초콜릿을 준다지만, 통상적으로는 여자가 좋아하는 상대에게 초콜릿을 주는 기념일이었다. 그런 날을 대비하여 치세이는 언제나 저를 응원해 주는 팬들을 위해 초콜릿을 한가득 준비했다. 비록 양이 많기에 수제로 만들 수는 없었지만, 이곳저곳 정보를 얻어서 가장 평이 좋고 퀄리티가 높은 초콜릿을 구하려고 애를 썼다고 하지. 아이조가 핸드폰을 켜 잠시 SNS를 살폈다. 치 쨩이 준 초콜릿에 그려진 그림, 치 쨩을 닮아서 귀여워~. 엣, 홈페이지 찾아봤는데 이거 따로 요청한 거?! 기본 구성에는 이런 그림 없어! 결과적으로 치세이가 준비한 이벤트는 팬들에게 호평으로 남은 이벤트였다. 초콜릿을 준비한다고 라이브 준비를 대충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노력의 결과였다.
 
    라이브가 끝난 후에는 팬들과 만나 직접 준비한 선물을 나누어주어 SNS에는 눈물을 보이는 팬들도 있었다. 그래, 좋은 이벤트인 거, 아이조도 잘 알고 있었다. 치세이가 저를 응원해 주는 팬들을 위한 마음도, 그 보답을 하는 것도, 언제나 대가 없는 사랑을 받는 그들이 당연히 응해줘야 한다는 걸, 아이조도 프로 아이돌이었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알지만……
   
    ‘내가 좋은 거 아니었어?’
 
    아이조가 받은 저 높디높은 산 중에서 치세이가 준 초콜릿은 없었다. 그렇게 초콜릿을 준비하고, 팬들뿐만 아니라 몇몇 아는 사람들에게도 선물했으면서, 정작 치세이에게 이런 날 받아야 하는 저만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황당했다. 아니, 치세이에게 초콜릿을 맡겨둔 건 아니지만, 정말 여자들 마음은 모르겠다고……! 태도나 얼굴엔 저를 좋아한다고 전부 드러내는 치세이가 이런 날 아무것도 주지 않으니, 착각이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착각일 리가 없다. 그럼에도…… 하아, 아이조의 숨이 깊어졌다. 결국 치세이에게 아무것도 받지 못하고 하루가 저물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마주한 치세이는⎯
 
[2]
    아이조가 복도 끝에서 걸어오는 치세이를 마주했다. 앞에 아이조가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치세이가 뒤늦게 그의 존재를 확인하자, 평소처럼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태도에서부터 저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데. 스케줄이 없어 평범하게 하교할 때까지도 치세이는 아이조에게 어떠한 것도 건네주지 않았다. 아이조는 반응 없는 치세이의 라인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괜한 의미 부여였다. 신경 쓰지 않기로 생각하면서도, ……나 지금 걔한테 서운한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치세이 주제에, 바보 사쿠 주제에. 혀를 짧게 찬 아이조는 어김없이 연습실로 향했다.
 
    노을 진 하늘이 어느새 캄캄한 색으로 둔갑할 때쯤, 치세이에게 전화가 걸렸다. 아이조 군, 혹시 연습 끝났어? 전화를 받자마자 치세이가 꺼낸 말에 아이조는 저도 모르게 퉁명스러운 말투가 흘러나왔다. 분명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으면서도. 어, 방금. 왜? 치세이는 이런 아이조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럼, 집 앞 공원으로 와 주지 않을래……?! 기다리고 있을게! 그 말을 남긴 채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며 하? 황당한 숨을 뱉은 아이조는 금방 자전거에 올랐다. 아직 2월이라고는 해도 날이 쌀쌀한 밤이었다. 언제 도착할 줄 알고 기다린다는 건지. 평소보다 조금 더 속도를 올려 페달을 밟았다. 가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공원에 도착한 아이조가 흩날린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주위를 살폈다. 가로등 불빛만이 온전한 빛으로 남은 공원은 인적이 드물어 조용하고도 싸늘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그 어디에도 치세이가 보이지 않자, 그가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건 순간,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아이조의 어깨를 콕콕 찔렀다. 고개를 돌리니, 시야 아래에 있는 건 기다린다고 했던 치세이. 입을 열 틈도 없이 치세이가 아이조를 향해 무언가를 내밀었다.
 
    “최대한 준비하고 싶었는데, 시간이 부족해서…… 그래도 직접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으음⎯…… 너무 늦었네. 미안……”
 
    아이조의 눈을 제대로 마주하며, 우물쭈물 꺼낸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부끄러운지, 혹은 저를 기다리느라 추워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귀 끝이 붉어져 있다는 걸 치세이는 알고 있을까. 아이조는 곱게 포장된 케이스를 한 번, 그리고 치세이를 한 번씩 번갈아 쳐다보았다. 신경 쓰지 않는다고,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게 사람 마음만큼 쉬운 일이던가. 그러면서도 머릿속에 내내 머문 고민이 치세이의 말을 들으니⎯
 
[3]
    아이조가 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어쩐지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가는 것 같아서 이런 바보 같은 모습을 치세이에게 보여줄 수는 없었다. 아이조는 조심스럽게 목을 다듬고, 쓰고 있던 캡모자의 챙을 잡고 누르며 아무렇지 않은 척 치세이가 내민 초콜릿을 받았다. 이번 라이브랑 동시에 이벤트 준비한다고 바빠 보이던데, 대충 넘기지, 뭘 굳이…… 그래도 고맙다. 치세이에게 옮은 탓일까, 혹은 저 역시 추위를 먹은 것일까. 아이조는 제 얼굴에 조금씩 열이 오르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아이조가 초콜릿을 받으니, 그제야 안심한 듯 치세이가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 사이에 도는 짧고 어색한 침묵. 야, 슬슬 가자. 너 감기 걸리겠네. 아무래도 아이조가 오기 전부터 기다렸을 치세이니까, 최근 무리하기도 했고. 그를 걱정하여 재촉하자, 으응, 고개를 끄덕인 치세이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아이조의 옷소매를 붙잡고는
 
    백만 번의 키스는 못 해주지만…… 그리 말하며 치세이가 웃었다. 너……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닿았던 볼이 여전히 화끈거렸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한 아이조가 얼굴을 잔뜩 붉히며 그저 치세이를 바라보기만 했다. 하고픈 말은 많은데,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어서. 갑자기 어디서 이런 용기가 난 거지? 기껏 고민이 해결되자, 치세이는 또 다른 난제를 안겨주었다. 당혹스러운 마음을 감추려고 눈을 질끈 감았지만, 그러다가도 짧은 숨을 내쉰다. 다시금 눈높이를 맞추어 치세이의 눈동자를 마주한다. 제 시야 가득 들어오는 아이조에 치세이가 무심코 한 걸음 멀어졌다. 먼저 입 맞춘 게 누군데…… 그 모습이 또 황당하긴 했지만, 이렇게 의식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서. 곧 아이조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린다.
 
    ……너무 이른 거 아니냐? 아직은 만 번이어도 벅차다고. 무대 위 왕자님과는 달랐다. 치세이가 마주하는 건 왕자님 아이조가 아닌 시바사키 아이조니까. 화이트데이 답례는 각오하고 있으라고. 아이조가 손을 내밀었다. ⎯응! 눈과 눈을 맞추고, 서로의 손을 맞잡으며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기 전, 공원을 산책하며 잠깐이나마 밤의 고요를 즐겼다. 아이조에게 이번 이벤트와 그에게 줄 초콜릿을 만들며 생긴 일화를 들려주었다. 얼굴은 붉어졌지만, 또 평소처럼 평범하게 이야기하는 치세이를 보며 아이조는 잠시, 맞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어느 때보다 달콤했던, 또 특별한 밸런타인데이가 저물어 간다.
 

이전다음

012